첫사랑을 잊기 위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게 정말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소설을 덮으면서 그 질문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눈물이 사라진다 해도』는 전작의 조연이었던 와타야 이즈미가 주인공이 되어, 잊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잊지 못하는 감정의 무게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입니다.
줄거리: 이즈미의 첫사랑과 삼각관계 서사
가미야 도루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대학교 2학년이 된 와타야 이즈미는 후배 나루세에게 고백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즈미가 내건 조건이 심상치 않습니다. "사귀어도 되지만 날 정말 좋아하진 말 것." 솔직히 이 장면을 처음 읽었을 때, 이게 무슨 조건인가 싶어서 잠깐 책을 내려놨습니다. 그런데 읽을수록 이즈미의 그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설의 핵심은 복선 회수(伏線回収)에 있습니다. 복선 회수란 앞서 흘려둔 단서나 암시가 나중에 의미를 갖게 되며 이야기가 완성되는 서사 기법입니다. 전작을 유심히 읽은 독자라면 이미 이즈미가 도루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겁니다. 이즈미의 시선이 유독 도루에게 향해 있었거든요. 제가 직접 읽으면서도 중간중간 '이즈미가 도루 좋아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으니까요.
이 소설은 삼각관계(三角関係)라는 서사 구조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삼각관계란 세 인물 사이에 감정이 얽혀 한 명이 필연적으로 상처를 받게 되는 구도를 말하며, 독자에게 긴장감과 감정이입을 동시에 유도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억을 잃는 마오리가 매번 이즈미에게 "혹시 도루 좋아해?"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전날의 기억이 없는 마오리조차 이즈미의 마음을 느꼈다는 설정, 소설적 장치지만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멀리서 책을 읽는 독자도 눈치채는데 소설 속 마오리는 어떻겠어요. 당연히 눈치를 챘겠죠. 어쩐지 소설에도 마오리가 이즈미에게 도루 좋아하는지 계속 물어보네요. 기묘한 삼각관계 참 재밌어요.
이치조 미사키 작가가 이번 작품에서 특히 잘한 부분은 감정 서사의 밀도입니다. 이즈미가 입시를 핑계로 도루와 거리를 두는 장면, 축제날 우연한 사고로 입술이 닿는 장면, 마오리를 향해 "방해하는 건 나야!"라고 외치는 장면까지 감정의 흐름이 매우 촘촘하게 쌓여 있습니다. 문학 비평에서 말하는 정서적 핍진성(emotional verisimilitude), 즉 감정이 실제처럼 느껴지는 밀도가 높은 작품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도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저도 중학교 때 삼각관계일뻔한 적이 있어요. 뭔가 사람 눈은 비슷해서 괜찮은 사람은 다 좋아하더라고요. 특히 친구는 보통 취향이 비슷한 경우가 많죠. 같은 남자를 좋아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러면 곤란할까봐 일부러 감정을 억누르기도 했어요. 이즈미처럼요. 이즈미는 소설속에서 표출도 하지만 저는 표출도 안하고 그냥 수그러들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하면 후회밖에 안 남았습니다.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한거였죠. 저도 이제 누군가를 좋아하면 눈치 보지 말고 적극 표현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게 오히려 상대방을 덜 불편하게 만드는 거일수도 있죠. 본인 때문에 친구가 마음 표출도 못하면 안되니까요. 오히려 선의의 경쟁을 하는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이 좋았던 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전작의 미세한 빈틈을 이즈미 시점에서 새롭게 채워 이야기 전체의 입체감을 높인 점
- 기억상실증이라는 특수한 설정을 삼각관계와 절묘하게 연결한 점
- 이즈미가 도루에 대한 소설을 써서 공모전에 제출하는 결말 구조가 자연스럽게 감동으로 이어진 점
- 시상식에서 등장하는 '가미야 도루'라는 이름의 남자, 그의 작품 주제가 '샘(이즈미)'이라는 마지막 반전
삼각관계와 첫사랑: 이즈미의 선택에 대한 솔직한 생각
이즈미는 나루세에게 헤어지자고 하는데, 사실 현실이었으면 나루세를 그냥 만났을 것 같습니다다. 소설처럼 가미야 도루라는 환상적인 인물이 아니라면 말이죠. 도루처럼 다정하고 따스하면 사실 만나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죽은 가미야 도루를 잊지 않기 위해 나루세랑 헤어진다는 건 사실 어리석은 결정이에요. 만약 도루가 살아있어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었을 확률이 높기에 포기하고 다른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오리보다 사실 이즈미와 가미야 도루를 응원했지만, 미오리와 가미야가 범잡을 수 없는 서사를 이루기 때문에 둘은 이루어져야 하거든요.
캐릭터 서사(character arc)란 인물이 사건을 통해 내면적으로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이즈미의 서사는 첫사랑을 가슴에 묻고 멈춰 있던 사람이, 그 감정을 부끄럽지 않은 보물로 인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저는 그 메시지 자체는 정말 좋았습니다. "잊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라는 말이 단순히 소설 속 대사가 아니라, 실제로 감정을 억눌러 본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문장이었거든요.
감정 억압(emotional suppression)은 심리학에서 부정적 감정을 의식적으로 누르는 행동을 말하며, 장기적으로 심리적 소진과 후회를 유발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이즈미가 마음을 숨기고 도루를 멀리했던 것, 저도 그 시절에 비슷한 선택을 했던 것, 결국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개인적으로 와닿았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희생적 감정구조 인물, 이즈미
일본 청춘 소설의 감정적 몰입도에 대한 연구에서도, 자기희생적 감정 구조를 가진 캐릭터가 독자의 공감 지수를 높이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출처: 일본문학연구회). 이즈미는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보다 친구를 먼저 생각하는 캐릭터, 하지만 그 안에 단단한 감정이 꽉 차 있는 인물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마오리와 도루가 이루어진 이후의 번외편이 나왔으면 합니다. 마오리가 기억 장애를 극복하고 도루를 다시 만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제 상상으로는, 도루는 감격하면서도 특유의 다정함으로 마오리를 더 꼭 붙잡았을 것 같습니다. 팬서비스 차원에서 작가가 한 번쯤 써줬으면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전작을 읽지 않아도 따라갈 수 있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두 작품이 함께 쌓아올린 감정의 밀도를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전작부터 순서대로 읽는 것을 권합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이즈미의 수상 소감이 한동안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있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저 인정하면 된다." 좋아했던 감정을 지워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분이라면, 이 소설이 꽤 다른 관점을 건네줄 겁니다. 저처럼 그 시절 감정을 조용히 눌러두었던 기억이 있다면, 읽는 내내 이즈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