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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무늬 서평 (안면인식장애, 촉각기억, 사물의 기억)

boosuk1 2026. 8. 26. 16:28

목차


     

    본가에 갈 때마다 제가 실수로 흘린 음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책 표지를 봅니다. 그 얼룩 하나가 어릴 때 기억을 통째로 불러오는 경험을 하고 나서, 사물이 기억을 담는다는 말을 단순한 감성으로 치부하지 않게 됐습니다. 『기억의 무늬』는 바로 그 감각, 즉 얼굴이 아닌 손끝으로 세상을 기억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안면인식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촉각으로 세상을 읽는 방식

    일반적으로 소설 속 탐정이나 추리형 주인공은 예리한 시각과 논리로 사건을 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출발합니다. 주인공 카미는 안면인식장애(prosopagnosia)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면인식장애란 다른 인지 기능은 정상이지만 사람의 얼굴을 구별하고 기억하는 능력만 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결함이 생긴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얼굴을 못 외우는 수준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낯선 사람인지 아닌지 자체를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카미는 그 공백을 촉각기억(haptic memory)으로 채웁니다. 촉각기억이란 손끝이나 피부를 통해 느낀 질감·온도·형태가 뇌에 저장되는 기억 방식으로, 시각 중심 사회에서 흔히 간과되는 감각 채널입니다. 카미는 옷의 직물 조직, 가구의 나뭇결, 손때가 쌓인 자리를 읽으며 그 사물을 소유했던 사람의 흔적을 추적합니다. 제가 직접 읽으면서 예상 밖이었던 건 이 설정이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소설 전체 서사의 근간이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카미가 의상 디자인을 전공하게 된 이유도 단순한 취미가 아닙니다. 세 살 때 눈앞에서 벌어진 부모님의 죽음, 그리고 사건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 번째 실루엣의 직물 감촉을 지금도 손끝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년 동안 그 촉감 하나를 단서로 미제 살인 사건을 추적해 온 것입니다. 소설 속 표현처럼 "오직 촉감만이 나를 이끌고 있었다"는 문장이 과장처럼 읽히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카미의 감각이 포착하는 것들

    카미가 사람과 사물을 기억하는 방식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읽으면서 제가 실제로 메모해 둔 항목들입니다.

    • 옷의 직물 조직(textile weave) — 씨실과 날실의 밀도, 표면 마감 방식으로 소유자의 생활 방식과 경제적 배경을 추론
    • 걸음걸이와 체형에서 만들어지는 마모 패턴 — 자주 걷어 올리는 소매, 반복된 동작이 남긴 주름
    • 가구의 나뭇결(wood grain)과 상처 — 아기 침대 다리의 쪼개진 틈처럼, 수백 년의 시간이 새겨진 문양
    • 체취와 각질이 섬유 조직에 침투한 정도 — 오래 입은 옷일수록 주인의 신체 정보를 더 많이 담고 있다는 논리

    실제로 섬유 과학 분야에서도 의류의 섬유 조직 분석을 통해 착용자의 생활 습관이나 환경 노출 정도를 추정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출처: Nature Materials Science). 소설이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 읽는 내내 긴장감을 높여 줬습니다.

    요약: 안면인식장애를 가진 카미는 촉각기억으로 사람과 사물을 기억하며, 이 설정이 소설의 추리 구조 전체를 떠받치는 핵심 장치다.

     

    사물이 기억을 담는다는 감각, 그리고 제가 반성한 것

    저는 독립하면서 꼭 필요한 물건만 가져왔고, 이사할 때마다 오래된 물건은 과감히 버려왔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공간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이 길어야 5년을 넘지 않습니다.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그게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의도치 않게 기억을 같이 버려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본가에는 여전히 제가 어릴 때 쓰던 머리핀, 앨범, 낡은 책이 있습니다. 그 물건들을 손에 쥐는 순간 후각이나 촉감이 함께 살아나는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이걸 심리학에서는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라고 부릅니다. 체화된 인지란 기억이 뇌에만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 감각과 함께 저장되어, 특정 촉각이나 냄새가 기억 인출의 트리거가 된다는 이론입니다. 카미의 설정이 이 개념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백희성 작가가 단순히 감성적인 장치로 촉각을 선택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제가 반성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카미는 안면인식장애가 있어도 자신을 스친 사람의 옷 질감을 19년이 지나도 기억합니다. 저는 아무런 장애 없이 눈으로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한두 번 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카미의 집념과 감각적 정밀함을 보고 나서, 제 경우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였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작가 백희성의 배경이 소설에 녹아드는 방식

    작가 백희성은 건축가 출신입니다. 프랑스 폴 메이몽 젊은건축가상을 수상하고 세계적 건축가 장 누벨 사무소의 디렉터를 역임한 이력이 있습니다. '기억을 담은 건축'을 모티브로 활동해 온 만큼, 공간과 사물이 사람의 흔적을 기록한다는 주제 의식이 이 소설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전작 『빛이 이끄는 곳으로』에서 빛과 공간의 언어를 썼다면, 『기억의 무늬』에서는 옷과 가구의 촉감이라는 훨씬 미시적인 언어로 같은 주제를 파고든 것입니다.

    제 경험상 건축적 사고방식을 가진 작가의 소설은 공간 묘사와 사물 배치에 특유의 밀도가 있습니다. 아기 침대의 나뭇결 문양이 수백 년 전 양식으로 새겨진 이유가 후반부 반전과 연결되는 방식은, 단순히 소설적 기교라기보다 공간의 레이어를 읽어온 건축가의 시선처럼 느껴졌습니다. 건축 분야에서도 공간이 사용자의 감정과 기억에 미치는 영향은 환경심리학(environmental psychology) 연구의 핵심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환경심리학이란 물리적 환경이 인간의 행동·감정·인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 학문으로, 건축 설계에도 직접 적용됩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백희성 작가의 소설이 감성적 울림을 넘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약: 사물이 기억을 담는다는 감각은 체화된 인지 이론과 맞닿아 있으며, 건축가 출신 작가의 시선이 소설에 구조적 밀도를 더한다.

     

    자주 묻는 질문

    Q. 『기억의 무늬』는 추리소설인가요, 감성 소설인가요?

    A. 일반적으로 추리소설과 감성 소설은 서로 다른 장르로 분류되지만, 이 작품은 두 가지를 동시에 가져갑니다. 미제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긴장감 있는 플롯이 뼈대를 이루고, 그 안에 잃어버린 감정과 사랑을 되찾는 서사가 살을 붙이는 구조입니다. 추리 장르에 익숙한 독자도, 감성적 문학을 선호하는 독자도 각자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Q. 안면인식장애가 있으면 실제로 일상생활이 얼마나 불편한가요?

    A. 안면인식장애는 얼굴 구별 능력만 손상되고 다른 인지 기능은 정상인 경우가 많아, 소설 속 카미처럼 주변에 들키지 않고 생활하는 경우도 실제로 있습니다. 걸음걸이, 목소리, 헤어스타일, 옷 같은 시각적·청각적 단서를 조합해 사람을 식별하는 방식으로 보완합니다. 가볍게는 인구의 2~3%가 어느 정도의 안면인식 어려움을 경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Q. 전작 『빛이 이끄는 곳으로』를 읽지 않아도 이 책을 읽는 데 지장이 없나요?

    A. 두 작품은 독립된 이야기로, 전작을 읽지 않아도 『기억의 무늬』를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전작에서 빛과 공간으로 기억을 다뤘던 작가의 주제 의식을 알고 읽으면, 이번 작품에서 촉각으로 이동한 감각의 변화를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Q. 이 소설, 어떤 사람에게 특히 추천하나요?

    A. 제 경험상 오래된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 혹은 반대로 저처럼 물건을 자주 정리하다가 뭔가 비워진 느낌을 받은 적 있는 사람에게 특히 잘 맞는 소설입니다. 또한 감각적인 문체를 좋아하는 독자나, 건축과 공간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도 읽을거리가 많습니다.

     

    결론

    『기억의 무늬』를 읽고 나서 제가 달라진 게 하나 있습니다. 집에서 물건을 만질 때 조금 더 천천히 손을 댑니다. 카미처럼 직물의 결이나 나뭇결을 읽을 능력은 없지만, 그냥 스쳐 지나갔던 감촉에 한 박자 더 머물게 됐습니다. 사물에 새겨진 시간을 의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소설이 단순히 '좋은 책'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읽고 난 뒤 자신의 삶을 다시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안면인식장애도 없고 특별한 사연도 없는 제가, 카미의 집념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주변 사람과 사물을 얼마나 무심히 지나쳤는지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서점에서 직접 펼쳐보고 싶은 분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20637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