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은 항상 마음을 달달하게 만듭니다. 설레고 싶거나 외로울때 저는 연애 소설을 읽습니다. 일상에서 느끼기 어려운 감정을 연애소설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동안 연애소설 속 주인공에게 빠지면 저도 소설 인물이 되어 함께 연애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번 소설은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세상이 사라진다해도 라는 소설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선행성 기억상실, 그 설정이 이 소설을 바꿔놓다
일본 소설인데 저는 무슨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고 제목과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특성인지도 모르고 갑자기 고백하는 이야기가 나오길래 뭐지 뜬금없고 너무 평범한거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다만 읽다가 여자주인공이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라는 희귀질환을 앓는다는 사실이 반전으로 다가오고 소설에 빠져들었습니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란 새로운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는 능력이 손상된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어제 있었던 일을 오늘 아침에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히노는 매일 아침 서랍 위에 놓인 요약 일기를 읽으며 자신의 상황을 다시 인식해야 했습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무겁게 느껴졌는지, 제가 직접 읽으면서도 가슴이 꽤 답답했습니다.
기억의 공고화(Memory Consolidation)라는 개념도 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기억의 공고화란 단기 기억이 반복과 감정적 각인을 통해 장기 기억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말합니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은 바로 이 과정이 차단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소설 속 도루는 한 가지 사실을 책에서 발견합니다. 자전거 타는 법처럼 몸으로 배운 절차 기억(Procedural Memory)은 이 장애와 관계없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절차 기억이란 의식적 회상 없이도 반복 훈련을 통해 형성되는 운동·기술 기억을 의미합니다. 도루가 히노에게 미술을 계속 그리도록 권유한 것도 바로 이 원리에 기대었습니다. 기억이 날아가도 실력은 쌓인다는 믿음으로요.
실제로 기억 장애 연구에서도 절차 기억은 해마 손상과 무관하게 보존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출처: 국립중앙의료원). 소설이 단순한 감성에만 기대지 않고 이런 신경과학적 근거를 바탕에 깔아두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면 과거를 잃는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미래도 잃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기억을 바탕으로 발전하고 성장해야하는데 기억하지 못한다면 미래 원하는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시험이든, 면접이든 모두 기억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초반부 미래를 잃어버린 히노의 답답하고 우울했던 감정이 공감되었습니다.
도루의 선택, 어떻게 볼 것인가
도루가 히노에게 자신의 장애 인지 사실을 수첩에 적지 말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독자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히노를 배려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게 완전히 맞다고만 보지는 않습니다. 도루의 존재 자체가 히노의 기억에서 지워진다는 건, 히노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우회한 결정이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소설이 이 설정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분명히 있다고 느꼈습니다. 사랑은 기억보다 감정의 층위에서 먼저 쌓인다는 것입니다. 히노의 수첩과 일기가 도루를 만나기 전 우울한 기록에서 점차 밝고 긍정적인 글로 채워진 것, 미술 실력이 3년에 걸쳐 눈에 띄게 성장한 것. 이것들이 말해주는 건 기억 없이도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목할 만한 심리적 장치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 히노가 매일 아침 요약 일기를 읽으며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행위는, 인간이 자기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심리학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 절차 기억의 보존: 기억이 사라져도 미술 실력이 쌓이는 것은 신경과학적으로 실제 가능한 현상입니다.
-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 도루와 히노가 반복된 일상 속에서 서로에게 정서적 안전 기지가 되어가는 과정은 존 볼비의 애착 이론과 연결됩니다. 애착 이론이란 인간이 특정 대상과의 정서적 유대를 통해 심리적 안정을 형성한다는 이론입니다.
도루와 히노가 치킨 샌드위치를 싸들고 소풍을 가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같이 소풍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읽으면서 느낀 건, 일본 소설 특유의 소소한 일상 묘사가 이야기의 감정선을 더 깊게 만든다는 겁니다. 소풍, 지역 축제 불꽃놀이. 읽는 내내 일본에 직접 가서 그 계절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올라왔습니다.
결말 : 기억과 상실, 독자로서 남은 질문들
도루가 죽기 전 와타야에게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워달라고 했다는 장면에서 저는 한참 멈췄습니다.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히노의 완치 이후 두 사람이 재회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읽었거든요. 그 기대가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히노가 결국 도루의 그림 한 장을 발견하면서 그의 존재를 서서히 기억해나간다는 결말은 의도적으로 뒤집힌 구조입니다. 보통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흐려집니다. 히노는 반대입니다. 갈수록 선명해집니다. 이 설정에 감동을 받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거기서 한 발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도루의 부재도 더 뚜렷해질 텐데, 히노에게 그것이 과연 100% 축복일까요.
다음 연애를 시작하려 해도 도루의 기억이 점점 또렷해진다면,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도루가 히노에게 남긴 삶의 방식이기도 하겠지만요. 이 소설을 두 가지 시각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짧지만 찬란했던 사랑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무거운 질문을 감성으로 포장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후자 쪽에 더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언젠간 죽죠. 그렇기 때문에 살아서 원하는 건 다 해봐야합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가야되지요. 도루의 인생은 짧았지만 히노를 만나면서 그 인생이 찬란히 빛났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달달한 로맨스를 기대하고 펼쳤다가 생각보다 훨씬 묵직한 여운을 안고 덮게 되는 소설입니다. 로맨스 소설이 주는 설렘을 즐기면서도 기억, 상실, 죽음 같은 주제를 한 번쯤 차분히 마주해보고 싶은 분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벚꽃 시즌에 일본 소설 한 권 들고 공원 벤치에 앉아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