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페이지짜리 책 4권을 붙잡고 앉아서,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한동안 멍했습니다. 연애소설이라고 가볍게 시작했다가 조선시대 붕당정치(朋黨政治)와 정조의 탕평책(蕩平策)까지 머릿속에 들어오는 줄은 몰랐거든요. 읽는 내내 행복했다는 한 줄짜리 감상이 가장 솔직한 표현입니다.
등장인물 소개, 구용하가 이 소설의 진짜 중심이었던 이유
정은궐 작가의 장편소설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후속작입니다. 남장(男裝) 여성 김윤희가 규장각(奎章閣)에 들어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규장각이란 조선 정조 때 설치된 왕실 도서관이자 학술 연구 기관으로,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던 공간이었습니다. 제가 이 소설에서 기대했던 건 솔직히 이선준과 김윤희의 로맨스였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어느 순간 눈이 자꾸 구용하에게 가더라고요.
구용하는 소설 전반부에서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웃고 떠들고 분위기를 풀어주는 역할이라 처음엔 조연 중의 조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권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이 인물이 완전히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겉에서 가장 가벼워 보이는 사람이 실제로는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는 것, 이게 제가 이 소설에서 받은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소설 속 구용하는 잘금 4인방의 우정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인데, 잘금 4인방이란 이선준, 문재신, 구용하, 그리고 여기에 엮인 윤희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우정의 구심점(求心點)이 사실은 구용하였다는 해석이 저는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구심점이란 여러 요소를 하나로 끌어당기는 중심 역할을 하는 지점을 뜻하는데, 용하가 없었다면 이 넷의 관계가 과연 그만큼 단단하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인상깊은 구절, 인생을 걸만한 인물을 만나다.
구용하가 선준 앞에서 눈물을 보이며 "사내에게 있어서 일생을 걸 만한 인물을 만난다는 건 정말 행운이거든"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책을 내려놓고 잠깐 생각했습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그 장면이 이렇게까지 마음에 꽂힐 줄은 몰랐습니다. 더러운 것은 내가 치우더라도 깨끗하게 앞만 보도록 곁에 있겠다는 말, 이게 단순한 충성이 아니라 진짜 우정의 언어라는 걸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와닿은 건 제 파트장님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회 초년생 시절 만난 분인데, 겉으로는 조용하고 연약해 보이지만 안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분입니다. 제가 실수해도 다그치기보다 믿어주셨고, 그 덕분에 저도 더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제가 파트장의 자리가 되었을 때는 지금 파트장님처럼 부서원을 헤아리고 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로는 강력하게 이끌고 때로는 한없이 보듬어주는 사람으로요.
그래서인지 구용하가 선준에게 느끼는 감정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 곁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보좌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법이거든요. 그리고 저도 선준을 닮고 싶었습니다.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에서 눈여겨볼 인물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구용하: 겉으로 가장 가벼우나 우정의 실질적 구심점 역할, 후반부에서 신스틸러로 활약
- 문재신: 진사시(進士試) 장원 출신으로 시문(詩文)에 자부심이 강하고, 칭찬을 원하는 솔직한 면이 매력
- 이선준: 윤희를 향한 섬세하고 든든한 사랑이 돋보이는 인물
- 김윤희: 남장이라는 설정이 소설에서 여성 역할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치
유리천장과 윤희의 남장, 조선과 지금 사이
윤희가 남장을 해야만 규장각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설정은 소설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지만, 그 설정 자체가 던지는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조선시대 여성은 과거제(科擧制)에 응시조차 할 수 없었고, 과거제란 능력 있는 인재를 관직에 등용하기 위해 시행한 국가 시험으로, 이 시험의 문이 처음부터 여성에게는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윤희의 남장은 그 막힌 문을 몸으로 비틀어 연 것인데, 제가 직접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게 단순한 역사적 고증 너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구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유리천장(Glass Ceiling)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유리천장이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성이나 소수집단이 일정 직위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의미합니다. 국내 1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2023년 기준 약 6.6%에 불과했습니다(출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같은 시기 OECD 주요국 평균이 30%를 웃도는 것과 비교하면, 조선과 현재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출산과 육아 문제는 이 구조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경력단절(Career Break)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경력단절이란 주로 임신·출산·육아를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고 노동 시장에서 이탈하는 현상을 뜻합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국내 경력단절 여성은 2023년 기준 약 139만 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출처: 통계청). 출산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신체적 과정이지만, 육아는 사회가 함께 분담할 수 있는 영역임에도 여전히 여성 개인에게 무게가 집중되는 구조가 이 숫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소설 속 윤희가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학문을 이어간 것처럼, 지금 시대에도 보이지 않는 저항을 일상 속에서 이어가고 있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소설이 단순한 시대극 로맨스로 읽히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탕평책(蕩平策)은 정조가 붕당 간의 갈등을 넘어 능력 있는 인재를 고르게 쓰려 했던 정책인데, 성별이라는 기준 하나를 더 걷어낸다면 이 정신이 지금 시대에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문재신이 진사시 장원으로서 시문에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홍점화의 벽서(壁書)를 보고 잠깐 풀 죽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벽서란 벽에 써 붙이는 익명의 글로, 당시 정치적 불만이나 주장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문재신의 거만함이 사실 칭찬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도 읽으면서 솔직히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도 그런 적 있으니까요.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잘금 4인방의 우정이 시대를 초월해서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관계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일은 내가 하더라도 함께하는 사람의 명성과 길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 이게 꼭 조선 시대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이 시리즈를 읽지 않으셨다면,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부터 순서대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전작의 맥락을 알고 읽을 때 우정의 깊이가 훨씬 더 잘 느껴집니다. 가볍게 시작해서 생각보다 오래 여운이 남는 소설, 그게 이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