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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워 서평 (반도체 삼국지, 공급망 구조, 미중 패권)

boosuk1 2026. 5. 30. 13:12

대학 시절 미중 무역갈등을 주제로 보고서를 쓰면서, 저도 처음엔 관세 싸움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파고들수록 결국 모든 갈등의 중심에는 반도체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반도체 산업 구조에 관심이 생겼고, 이번에 크리스 밀러의 칩워를 읽으면서 그 퍼즐이 훨씬 선명하게 맞춰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칩워 책 표지

역사가가 쓴 반도체 이야기, 칩워 삼국지처럼 읽힌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반도체 책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건조한 기술 서적을 각오했는데, 읽다 보니 손을 놓기가 어려웠습니다. 저자인 크리스 밀러는 원래 소련·러시아사가 전공인 국제사 교수입니다.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 몸에 밴 사람이 쓴 글이라 그런지, 회사 하나하나의 흥망이 마치 삼국지 속 나라들의 이합집산처럼 그려집니다.

이야기는 집적회로(IC, Integrated Circuit)가 처음 개발된 1958년부터 시작합니다. IC란 트랜지스터, 저항, 콘덴서 같은 전자 부품들을 하나의 작은 반도체 기판 위에 모아 놓은 회로를 말합니다. 이전까지는 진공관으로 연산을 처리했는데, 미사일 유도나 암호 해독 같은 군사 목적에 쓰기엔 크기도 크고 열도 많이 났습니다. 집적회로 개발은 그 한계를 돌파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를 개발한 쇼클리, 바딘, 브래튼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고, 벨 연구소라는 이름도 이 책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인식하게 됐습니다.

그 뒤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페어차일드 같은 회사들이 등장하면서 초기 반도체 시장을 미 국방성이 주도적으로 소비했다는 대목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민간 시장이 형성되기 전, 군사 수요가 산업 전체를 먹여 살렸다는 사실은 지금의 반도체 지정학적 민감성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반도체 공급망, 어느 한 나라가 독식할 수 없는 구조

미중 무역갈등을 공부할 때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느낀 점이 있습니다. 반도체를 장악한 나라가 세계를 장악한다는 말이 회자되지만, 실제 공급망을 들여다보면 단일 국가 독점은 구조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현재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설계(팹리스): 엔비디아, 퀄컴, 브로드컴 등 미국 기업이 주도. ARM의 IP 라이선스를 기반으로 칩을 설계합니다.
  • 파운드리(위탁 생산): TSMC(대만)가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 삼성전자(한국)가 추격 중입니다.
  • 반도체 장비: ASML(네덜란드), 도쿄일렉트론(일본) 등이 핵심 장비를 공급합니다.
  • 메모리 반도체: 삼성전자, SK하이닉스(한국), 마이크론(미국)의 3파전입니다.

여기서 팹리스(Fabless)란 공장 없이 설계만 전담하는 반도체 기업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파운드리(Foundry)는 설계 없이 생산만 담당하는 형태입니다. 이 분업 구조가 본격화된 건 21세기 들어서인데,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짓는 데만 수십조 원이 들다 보니 설계와 제조를 분리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작용했습니다.

특히 ASML이 독점 생산하는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는 현재 첨단 반도체 생산의 핵심 병목입니다. EUV란 파장이 13.5nm(나노미터)에 불과한 극자외선을 이용해 반도체 회로를 웨이퍼에 새기는 기술로, 수만 개의 초정밀 부품이 들어가는 이 장비를 만들 수 있는 곳은 전 세계에 ASML 하나뿐입니다. 미국조차 직접 생산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출처: ASML 공식 사이트).

책에서 꽤 비중 있게 다루는 부분이 1980년대 일본의 반도체 굴기입니다. 국가 자본을 등에 업은 일본 기업들은 D램 시장에서 미국을 상당 부분 밀어냈습니다. D램(DRAM, Dynamic Random Access Memory)이란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읽고 쓰는 데 사용하는 휘발성 메모리 반도체입니다. 당시 일본은 고품질 D램으로 가전 시장까지 장악하며 미국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결국 미국의 강력한 통상 압력을 받아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한국과 대만이었습니다. 삼성전자와 TSMC가 각각 메모리와 파운드리 분야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건 이 시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인텔이 D램 사업에서 사실상 철수하면서 이 시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구도로 재편됐습니다.

제가 직접 공부해보면서 느낀 건데, 일본의 사례는 단순히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지정학적 판단을 잘못 읽은 대가가 산업 전체에 영향을 미친 사례에 가깝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결국 기술과 외교가 함께 움직이는 영역이라는 점을 이 책이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미중 패권 경쟁, 공급망 분리는 가능한가

책의 후반부에서 가장 무게감 있게 다가온 건 중국의 반도체 자립 시도였습니다. 시진핑 정부는 중국제조 2025를 선포하며 반도체 핵심 기술의 자국화를 추진했습니다. 중국제조 2025란 중국이 2025년까지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 제조업 10개 분야에서 세계 수준에 도달하겠다는 산업 정책입니다.

이 흐름에서 미국은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수출 규제, ASML의 대중 EUV 장비 판매 금지 등 전방위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반도체 산업협회(SIA)에 따르면, 미국은 첨단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전 세계 시장의 약 47%를 점유하고 있어 수출 통제가 실질적인 타격이 될 수 있습니다(출처: 미국 반도체 산업협회(SIA)).

저는 이 대목에서 국내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몇 년 전 노노 재팬 운동과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기조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감정적으로는 이해되지만, 책이 내내 강조하듯 반도체 공급망은 수십 년에 걸쳐 전 세계가 분업 최적화를 이뤄 낸 결과물입니다. 하나의 나라 혹은 진영이 전 과정을 독자적으로 소화하겠다는 발상은 현실적으로 단기간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 공급망 리스크를 고려하면 전략적 자급화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를 겪으며 그 주장이 더욱 힘을 얻은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자급화와 협력 유지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가 진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기술의 문제이자 역사의 문제이고, 결국 외교와 전략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600페이지짜리 책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읽는 내내 몰입했습니다. 반도체나 미중 관계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꽤 좋은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엔비디아나 TSMC 관련 뉴스가 나올 때 맥락 없이 흘려보내던 분들이라면 더욱 권하고 싶습니다.


참고: https://blog.naver.com/kusa7701/22403553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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