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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기 서평 (여성 화원, 판타지 사극, 운명론)

boosuk1 2026. 6. 8. 23:17

홍천기 책 표지

정은궐 작가의 또다른 작품 홍천기 책을 소개하겠습니다. 21년 SBS 드라마로 나와 한번 더 화제가 된 책입니다.
솔직히 저는 홍천기를 처음 접했을 때 단순한 사극 로맨스물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은궐 작가님 답게 소설 깊이가 남달랐습니다. 단순 가벼운 로맨스 소설이 아니었어요. 읽다 보니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졌고, 그때부터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조선시대 실존 여성 화원의 삶과 판타지가 맞물린 이 소설은, 읽고 나서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조선 유일의 여성 화원, 홍천기라는 실존 인물

홍천기는 단순한 소설 속 창작 캐릭터가 아닙니다. 조선시대에 실제로 도화서(圖畵署) 화원직을 지낸 여성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입니다. 여기서 도화서란 조선의 왕실 소속 그림 제작 기관으로, 오늘날로 치면 국가 소속 전문 예술 기관에 해당합니다. 이곳의 화원(畵員)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린다는 차원을 넘어, 국가 공인 전문 화가 자격을 얻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조선시대 도화서는 철저히 남성 중심의 관료 조직이었습니다. 취재(取才)라는 시험 제도를 통해 화원을 선발했는데, 취재란 도화서 입직 시 치르는 실기 평가 방식으로 대나무, 산수, 인물, 영모 등 다양한 화목(畵目)을 기준으로 실력을 겨루는 제도입니다. 이 구조 안에서 여성이 화원직을 얻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관련 기록을 찾아보면서 더욱 놀랐던 부분인데요, 그 시대 여성에게 허락된 사회적 역할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생각하면 홍천기라는 인물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정은궐 작가가 매번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택하는 데는 일관된 시각이 있다고 봅니다. 숨죽여 살아가야 했던 조선 여성의 전형을 거부하고, 오히려 현대적 감각의 전문성과 주체성을 가진 여성상을 역사 안에서 끌어올리는 방식입니다. 성균관 스캔들의 김윤희, 해를 품은 달의 연우, 그리고 홍천기까지 모두 그 계보 위에 있습니다.

홍천기라는 인물을 분석할 때 주목할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실존 인물을 기반으로 한 서사 확장이라는 점에서 역사 팩션(historical fiction)의 성격을 지닙니다
  • 여성이 직업적 전문성으로 사회에 진입하는 서사 구조를 조선시대 배경에서 구현했습니다
  • 단순한 로맨스 주인공이 아니라,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플롯을 이끄는 핵심 동력입니다

한국고전종합DB에 따르면 도화서 관련 기록은 경국대전과 각종 의궤류에 산재해 있으며, 여성 화원의 존재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분류됩니다(출처: 한국고전종합DB). 이 사실을 알고 소설을 읽으면 홍천기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들이 전혀 다르게 읽힙니다.

판타지 사극 하람의 붉은 눈과 운명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판타지 요소가 이렇게 깊이 들어올 줄 몰랐거든요. 마(魔)와 귀(鬼)가 등장하고, 하람의 눈 자체가 사건의 근원이 되는 구조는 단순한 궁중 로맨스와는 결이 다릅니다. 하람의 붉은 눈은 소설에서 홍시안(紅視眼)이라는 설정으로 기능하는데, 이는 특정 존재나 기운을 감지하고 반응하는 초월적 시각 능력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앞을 못 보는 맹인 설정이 아니라, 그 눈 자체가 사건의 실마리이자 결말의 열쇠라는 점이 이 소설을 판타지 사극으로 분류하게 만드는 핵심입니다.

하람이 경복궁의 터를 지키는 관상감(觀象監) 소속 일관이라는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서 관상감이란 조선시대 천문, 지리, 역법, 기상 등을 담당하던 국가 기관으로, 오늘날의 기상청과 천문연구원을 합쳐놓은 것과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늘의 이치를 읽는 사람과 세상을 눈에 담아 그림으로 표현하는 사람의 조합이라니, 캐릭터 설계 자체가 이미 시적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떠올린 기억이 있습니다. 스무 살 때 정말 잘 맞는다고 느꼈던 사람과 헤어지면서, 서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진짜 운명이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일종의 운명 테스트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재회는 없었습니다. 그때는 낭만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건 둘 다 더 노력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람과 홍천기의 운명론

홍천기와 하람은 다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두 사람은 수동적으로 운명을 기다리지 않고 서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계속 충돌하고, 움직이고, 싸웁니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실제로는 능동적 선택의 연속입니다. 국립국어원의 문학 용어 해설에서도 운명론적 서사 구조는 인물의 의지적 행위와 결합될 때 비로소 극적 긴장감을 만든다고 설명하는데(출처: 국립국어원), 홍천기는 그 공식을 충실히 따릅니다.

운명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항상 반반이라고 답합니다. 운명적인 관계가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운명으로 만들어가는 건 결국 두 사람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괜찮아 보이는 사람을 만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때 저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넘긴 적이 많은데, 그 말의 전제는 결국 저도 그 관계를 인연이라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정말 운명이라고 느꼈다면 환경이 방해하더라도 제 의지를 관철시켰을 것입니다. 소설 속 홍천기가 그랬듯이요.

정은궐 작가의 홍천기는 가볍게 읽히면서도 읽고 나서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단순히 로맨스를 즐기고 싶다면 충분히 재미있고, 실존 인물의 역사적 맥락이나 조선시대 기관 구조에 관심이 있다면 더 깊게 파고들 수 있습니다. 2021년 김유정, 안효섭 주연 드라마로도 제작되었으니 소설을 먼저 읽고 드라마를 보는 순서를 권합니다. 소설 속 홍천기의 그림 열정과 하람의 붉은 세계가 어떻게 화면으로 옮겨졌는지 비교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날, 이 소설을 한 번 펼쳐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blog.naver.com/0010680/220907829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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