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난 5월 20일 발간한 따끈따끈한 신간 도서를 소개하겠습니다. 바로 반도체 강국의 역설이라는 책입니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주가가 많이 오르고 있죠. 그만큼 반도체를 향한 관심이 나날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다만 투자자라면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취약점도 아셔야 올바른 투자가 가능합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오를 때마다 '역시 반도체 강국이지'라고 생각하셨다면, 그 믿음이 절반쯤은 틀렸을 수 있습니다. 저도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반도체 강국의 역설'을 읽고 나서 그 자신감이 꽤 흔들렸습니다. 우리가 강한 건 메모리뿐이고, 그 그늘 아래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는 생각보다 훨씬 허약하다는 사실을 직접 짚어주는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메모리 편중, 왜 산업 구조적 문제인가
한국이 반도체 강국이라는 말에 의심을 품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별로 없었습니다. 삼성전자가 D램 세계 1위라는 사실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반도체 산업 전체를 강하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반도체는 산업 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동일한 제품을 대량 생산해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하는 구조입니다. 반면 시스템반도체는 CPU, GPU, AP처럼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반도체로, 설계 역량과 IP(지식재산) 축적이 핵심 경쟁력입니다. 여기서 IP란 반도체 설계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재사용 가능한 회로 블록을 의미하며, 이를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가 곧 기술력의 척도가 됩니다.
한국의 파운드리 산업이 태생적으로 취약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파운드리란 고객사의 설계를 받아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사업 모델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파운드리는 처음부터 독립적인 전략으로 출발한 게 아니었습니다. 메모리 생산 후 남는 구형 생산라인을 활용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시작된 사업이었고, 제가 보기에 그 출발점 자체가 지금의 구조적 한계를 만들었습니다. TSMC가 처음부터 파운드리만을 위한 생태계를 구축해 온 것과는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시스템반도체 분야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3% 내외에 불과합니다(출처: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메모리 분야에서 60% 이상을 점유하는 것과 비교하면 격차가 얼마나 큰지 한눈에 드러납니다.
팹리스 생태계, 왜 한국에서 크기 어려운가
팹리스(Fabless)란 반도체 제조 시설 없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기업을 뜻합니다. 엔비디아, 퀄컴, AMD가 대표적인 팹리스 기업입니다. 이들은 직접 공장을 돌리지 않고 설계 역량과 IP만으로 수십조 원의 기업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팹리스가 성장하기 어려운 데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강하게 지적하는 부분인데, 제가 읽으면서 특히 고개를 많이 끄덕인 대목이기도 합니다. 팹리스는 설계를 마친 뒤 반드시 파운드리에 위탁 생산을 맡겨야 하는데, 첫 시제품을 만드는 비용이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에 달합니다. 스타트업이나 중소 팹리스 입장에서는 단 한 번의 테이프아웃(Tape-out)이 회사의 명운을 가를 수 있는 수준의 금액입니다. 여기서 테이프아웃이란 반도체 설계를 완료하고 파운드리에 최종 생산을 의뢰하는 단계를 말하며, 이 비용 장벽이 국내 팹리스의 성장을 가로막는 핵심 요인 중 하나입니다.
대만이 TSMC를 중심으로 팹리스 생태계를 함께 키워온 것과 달리, 한국은 삼성전자라는 수직 통합 구조가 생태계 전체를 지배하다 보니 외부 팹리스가 파고들 틈이 좁았습니다. 책에서 제안하는 MPC(Multi Project Chip) 방식은 이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법으로 읽혔습니다. MPC란 여러 팹리스 기업이 하나의 웨이퍼를 공동으로 사용해 각자의 칩을 동시에 생산하는 방식으로, 개별 기업이 부담해야 할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국내 팹리스 기업 현황을 보면 상황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 국내 팹리스 기업 수는 약 100여 개 수준으로, 대만의 수백 개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습니다.
- 대부분이 매출 100억 원 이하의 영세한 규모로 운영 중입니다.
- 글로벌 선단 공정 접근이 어려워 기술 격차가 누적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이 구조를 방치한다면, AI·자동차·IoT 시대로 이동하는 다음 10년에서 한국이 또다시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시스템반도체 전환,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의 본질이 공정이나 설비가 아니라 팹리스 생태계에 있다는 책의 핵심 주장은 제가 보기에도 맞습니다. 반도체는 설계가 먼저고 제조는 그다음입니다. 어떤 칩을 만들지 결정하는 설계 단계에서 이미 경쟁력의 70% 이상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한국의 정책과 투자는 오랫동안 공장과 장비에 집중되어 왔습니다. 반도체 R&D 예산이 제조 공정 중심으로 편성되다 보니, 설계 인프라나 PDK(Process Design Kit) 표준화 같은 소프트웨어적 기반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습니다. PDK란 반도체 설계자가 특정 파운드리 공정에 맞게 회로를 설계할 수 있도록 제공되는 설계 규칙과 라이브러리 패키지입니다. 이게 잘 갖춰져 있어야 팹리스들이 빠르게 설계를 시작할 수 있는데, 국내 파운드리의 PDK 품질과 표준화 수준은 TSMC에 비해 아직 격차가 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또한 단기 성과 중심의 연구개발 평가 체계도 문제입니다. 반도체 설계는 수년에 걸친 IP 축적이 필요한 장기 과제인데, 1~2년 단위로 성과를 측정하는 행정 시스템 아래에서는 그런 투자가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솔직히 씁쓸했습니다. 현장을 모르는 구조가 현장을 갉아먹고 있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시스템반도체 비전과 전략에 따르면, 정부도 팹리스 육성과 설계 인프라 확충을 핵심 과제로 명시하고 있습니다(출처: 산업통상자원부). 방향은 맞습니다. 문제는 실행 속도와 구체성입니다.
투자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구조적 시사점
반도체 주식에 투자하고 계신다면, 이 산업 구조를 이해하는 게 단순한 교양을 넘어 실질적인 투자 판단 기준이 됩니다. 저도 이 책을 읽고 나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시황 사이클이 극단적입니다. 공급 과잉 시기에는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고, 기업 이익이 급감합니다. 반대로 공급 부족 시기에는 가격이 치솟아 대규모 이익이 발생합니다. 이 변동성을 완충해줄 캐시카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파운드리 사업이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면, 삼성전자 전체의 이익 변동성이 낮아지고 기업 밸류에이션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운드리 사업에는 현실적인 숙제가 두 가지 있습니다.
- 대규모 시설 투자에 따른 감가상각비 부담. 적자인 사업부를 살리기 위해 역설적으로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고, 그 감가비를 언제까지 안고 갈 수 있는지가 핵심 변수입니다.
- 수율 확보 문제. 파운드리는 고객과의 신뢰가 사업의 전부입니다. 같은 공정을 반복했을 때 불량 없이 칩이 나오는 비율, 즉 수율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지 않으면 고객을 유치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해결되지 않으면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반등 시점을 낙관하기는 어렵습니다. 투자자라면 분기 실적보다 이 구조적 지표들을 함께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도체 강국의 역설』은 불편한 책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성공 서사를 정면으로 흔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반도체에 투자하거나 이 산업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메모리 초격차라는 익숙한 서사 뒤에 무엇이 있는지 이 책으로 한 번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구조를 알아야 기회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