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월간 1위 소설 싯다르타 서평을 써보겠습니다. 처음 이 책 제목을 봤을 때, 부처님의 일대기를 소설로 쓴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고타마 싯다르타의 전기적 이야기를 픽션으로 풀어낸 거라고요. 그런데 실제로 읽어보니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책은 부처의 삶이 아니라, 헤세가 직접 창조한 인물 '싯다르타'를 통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이 책을 쓴 이유, 깨달음을 찾아서
헤르만 헤세는 1919년 데미안으로 문학적, 경제적 성공을 동시에 거머쥐었습니다. 그런데 1920년, 그는 글을 쓰지 못할 정도의 우울증에 빠집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참혹함을 직접 목도하면서, 이제 막 마흔에 접어든 작가의 눈에 세상이 다르게 보였던 것이겠지요. 개인적 성공과 사회적 붕괴가 동시에 찾아오는 시절을 버텨내며 정신분석 치료까지 받은 뒤 완성한 작품이 바로 1922년에 출간된 싯다르타입니다.
저도 요즘 비슷한 감각을 조금씩 느낍니다. 대기업에 취직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다음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데, 가끔은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불쑥 올라오거든요. 남들이 주말에 쉬는 동안 혼자 공부하고 있으면, 이 노력이 언젠가 의미 있을지 확신이 잘 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헤세가 성공 이후 우울증을 겪었다는 대목에서 묘하게 공감이 됐습니다. 저는 아직 거기까지 가보지 못했지만, '일단 성공하고 나서 고민하고 싶다'는 마음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소설 속 싯다르타는 브라만(Brahmin), 즉 인도 카스트 제도의 최상위 계층인 제사장 계급 출신입니다. 여기서 브라만이란 힌두교 전통에서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경전을 다루는 종교적 엘리트 집단을 뜻합니다. 남들이 원하는 삶을 태어날 때부터 갖춘 인물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스스로 걷어차고 출가합니다. 사문(沙門), 즉 출가하여 고행을 수행하는 수도자 집단에 합류해 금욕과 참선으로 깨달음을 추구하지만 결국 한계를 느낍니다.
싯다르타 인생 깨달음 과정
싯다르타가 느낀 한계는 단순한 수행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타마, 즉 소설 속에 실제로 등장하는 부처를 직접 만나 그 가르침을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깨달음은 당신의 것이지, 가르침으로 전달될 수 없다." 이 장면이 제 경험상 이 책에서 가장 서늘하게 와닿은 부분입니다. 깨달음은 결국 각자가 직접 겪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니까요.
싯다르타가 오온(五蘊)을 통한 왜곡된 세계 인식을 이야기하는 대목도 주목할 만합니다. 여기서 오온이란 색(물질), 수(감각), 상(지각), 행(의지), 식(의식)의 다섯 가지 요소로, 불교에서는 인간이 이 다섯 가지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지만 그것이 실상을 왜곡한다고 봅니다. 욕망과 집착이 가미된 오온의 인식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싯다르타는 이 허상을 깨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중년이 되어서야 속세에 뛰어들어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돈도 벌며 살다가 다시 공허함을 느끼는 순환을 겪게 됩니다.
싯다르타의 구도 여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브라만 계층 출신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깨달음에 대한 열망을 품음
- 출가하여 사문 집단에서 고행과 참선으로 수행
- 소설 속 고타마(부처)를 직접 만나 가르침을 인정하나 개인적 경험의 필요성을 깨달음
- 속세에서 사랑, 돈, 쾌락을 경험하지만 다시 공허함에 빠짐
- 노년에 뱃사공 바주데바를 찾아가 강(江)에서 최종 깨달음에 이름
강이 가르쳐준 것, 반야바라밀의 의미
소설의 후반부에서 싯다르타는 바주데바라는 노(老) 뱃사공의 조수가 됩니다. 처음 중년의 싯다르타를 속세로 실어 날랐던 바로 그 뱃사공입니다. 바주데바는 말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강을 듣는 법을 가르쳐줄 뿐입니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강의 소리에서 생성과 소멸, 기쁨과 슬픔, 탄생과 죽음이 하나의 소리로 합쳐지는 것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습니다. 공이란 단순히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찰나적으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그 본질은 서로 공변적(公遍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나와 강, 나와 타인, 나와 세상이 사실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입니다. 이 인식에 이른 자만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 도달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반야바라밀이란 산스크리트어 'Prajnaparamita'를 음역한 것으로, '지혜로 피안(저편)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쉽게 풀면 속세의 번뇌를 넘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지혜를 말합니다(출처: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헤세가 이 소설에서 끝내 '깨달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지 않은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제가 읽으면서 처음엔 그게 좀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뭘 깨달았다는 거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깨달음은 언어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경험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 주장이니까요. 부처의 가르침도 직접 경험 없이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싯다르타는 이미 중반부에 선언했습니다.
실제 불교 수행의 차원을 보면, 깨달음의 단계가 획일적이지 않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사선(四禪), 즉 네 단계의 선정 수행을 통해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의 네 가지 깨달음의 경지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사선이란 욕망의 세계를 벗어나 점점 더 고요한 집중 상태로 진입하는 명상의 네 단계를 뜻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단계를 반드시 순서대로 밟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단번에 특정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는 점입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설 속 싯다르타가 강에서 단번에 최종 깨달음에 이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직 제가 성공을 향해 달리는 중에 있고, 그 허탈함이나 공허함을 제 몸으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브라만처럼 이미 가진 삶을 살고, 저는 그걸 얻기 위해 주말에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를 덧없게 보기엔 아직 제가 너무 간절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나중에 다시 읽으면 분명히 다르게 읽힐 것 같습니다. 성공 이후 달관의 태도를 고민할 시점이 오면, 그때 싯다르타가 강에서 들은 소리가 조금 더 가까이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헤세가 이 소설을 통해 건넨 말은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대로 두는 것, 'Let it be'의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진다는 느긋한 확신. 이 두 가지가 헤세 자신이 우울증의 방황 끝에 붙잡은 것이었고, 싯다르타가 강에서 배운 것이기도 합니다.
각자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있듯, 이 소설도 읽는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른 책이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 크게 흔들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강은 어디서든 흐르고 있으니까요. 아직 성공을 향해 달리는 중이라면 우선 달려보고, 그 길 끝에서 다시 이 책을 꺼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때는 분명 다른 문장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